제발 둘러쌓지 맙시다

'둘러쌓인'

이제는 '둘러싸인'을 몰아내고 표준어가 되어 가는 것 같은데 이래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쌓다'는 무언가의 위에 무언가를 올린다는 말이고 (수직적인 얹기 : pile up, stack)
'싸다'는 어떤 물건의 주위를 둘러서 가린다는 말이라서 (수평적 또는 전방위적인 감싸기 : wrap)
보통 이야기하는 '동일평면상의 감싸기'의 경우에는 '둘러싸다 - 둘러싸인'을 써야 합니다.

(물론 '집 주위에 담을 둘러쌓다' 와 같이 어떤 물체 주위에 어떤 물건들을 빙 둘러서 올려 쌓는 경우에는 '둘러쌓다 - 둘러쌓인'을 사용합니다만 이런 경우는 훨씬 적습니다.)


'나는 친구들에게 둘러쌓여 있었다' 는 애초에 말이 안 되지만 그래도 뜻풀이를 한다면 나는 맨 아래 가운데에 있고 내 주위를 빙 둘러서 친구들이 산더미처럼 올라가서 쌓여 있다는 말이 됩니다. (나는 벌써 압사했겠습니다.)

'꽃들에게 희망을' 책에서 애벌레들이 산을 이루면서 쌓여 있는 모습이 상상되는군요.


방송이고 신문이고 이제는 '둘러싸인'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백이면 구십구는 '둘러쌓인' 입니다.
더이상은 쌓지 맙시다. 자꾸자꾸 쌓으면 대기권 밖으로 올라갑니다.

Posted by liquidbird

2007/02/04 10:39 2007/02/04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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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을 바로 씁시다. 2006/11/11

11월 11일 빼빼로 데이군요^^.


인터넷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 보면 우리말을 잘못 쓰는 걸 너무 많이 보게 됩니다.
저 역시 우리말을 잘못 쓰는 경우도 많고, 국어학자도 아니고 전공자도 아니고 국어 순화 운동가도 아니고 순우리말도 그다지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오히려 그렇게 때문에 저마저도 틀리다는 걸 명확히 알 수 있는 건 정말 잘못 쓰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하세염' 과 같이 유행에 따라 변하는 통신체라든지 속칭 외계어와 같이 우리말의 개념을 완전히 깨버린 말들은 별로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 건 일부러 재밌으라고 쓰는 말일 뿐이죠.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예를 들어 입사지원서나 공식적인 보고서를 쓸 때에도 틀린 줄 모르고 쓰는 틀린 말들입니다. 이런 말들은 조금씩 우리말을 잠식하고 변화시켜 나갑니다.

물론 말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 중에서도 시대의 흐름을 받아들여서 변해야 하는 것도 있을 것이고, 변하지 않는 편이 더 나은 것도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사람마다 다 다르게 생각하겠지만요.

저는 제 기준에 맞추어 생각날 때마다 조금씩 적어 보려고 합니다.



무려

(無慮)【부사】 어떤 수효를 말할 때, 그 수가 예상보다 많음을 나타내는 말.
¶ 사상자가 ∼ 수천 명에 달했다/ 물가가 한 달 새에 ∼ 두 배나 올랐다.
(민중국어사전)

많은 수를 강조하는 부사. 우리말로는 '자그마치. 영어로 치자면 as many as 입니다.
數나 量과 관계된 경우에 써야 합니다만 요즘은 '오늘 어디에 갔는데 무려 김상식씨를 만났다.' 처럼 수 개념과는 상관없이 단지 강조의 의미로 쓰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몇 년 전만 해도 볼 수 없었던 용법인데 2,3년 사이에 부쩍 많이 보이며,
주로 우리말로 쓴 글인데 일본어를 직역한 듯한 느낌이 나는 글에서 특히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일본어투'와 직접적으로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바닦

'바닥'을 잘못 쓴 것입니다.
바닥은 아래에 있는 것인데, '바닥'이란 글자에서 아래쪽에 있는 것은 ㄱ 이고, 바닥-아래라는 '뜻'과 ㄱ의 '위치'가 절묘하게 조합되어 뜻에 의해 글자가 강조되면서 ㄱ이 ㄱㄱ으로 변했..을까요? ^^;



소희

여자 이름이 아닙니다. 소위(所謂), 즉 '이른바' 를 잘못 쓴 것입니다.
'소희 지식인이란 사람들이 어쩜 저럴 수가 있냐.' 대략 이렇게 쓰였더군요.
한자를 모르는 상태에서 문장 속에서 발음만 계속 들으면서 글자를 유추하다 보니 이런 일이 생깁니다.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죠. 또 하나 예를 들자면.



문안하다

'어렵지 않다'는 '무난(無難)하다' 입니다. 없을 무, 어려울 난. 정말 어려울 게 없는 한자입니다.
그런데 이 한자를 모르면서 역시 발음으로 글자를 만들다 보니
'그 사람은 성격이 문안합니다.' 처럼 아무 때나 병문안을 드리는 문장이 되어 버리죠.
하나 더 예를 들어 볼까요.



유관

有關(있을 유, 관계 관 : 관계가 있음). '유관 기관에 협조 공문을 발송하다.' 처럼 올바로 쓰이는 것이 아니라 肉眼(육안. 맨눈)을 유관이라고 쓰는 경우도 참 많이 봅니다.
'유관으로도 보일 만큼 밝게 빛나는 별'. 이런 식으로요.
사태가 점점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잘못 쓰이는 우리말에도 종류가 여러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맨 위의 '무려'와 같은 경우 분명히 잘못된 용법으로 쓰고 있긴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고 점점 많은 사람들이 數 강조가 아닌 단순 강조 부사로 쓸 경우 단어의 뜻 자체가 바뀔 수도 있다고 봅니다. (물론 저는 '무려'의 뜻이 그렇게 안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만 이건 제 마음대로 되는 일은 아니죠.)

하지만 '문안하다'와 같은 경우는 그냥 단순히 몰라서 틀리게 쓰는 경우이고, 이건 절대 바뀔 수도 없고 바뀌어서도 안 됩니다. 이처럼 구성 한자가 뭔지를 몰라서 소리나는 대로 글자를 만드는 경우가 요즘 너무 많이 보이고 점점 더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걸 줄이려면 학생들에게 한자 교육을 제대로 시켜야 합니다.
제대로 시킨다는 말은 중국 고전을 가르치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한자어가 어떤 한자로 구성되어 있는지, 무슨 뜻을 지니는 말인지를 제대로 알려 주면 됩니다. 한자를 쓸 줄은 몰라도 됩니다.



또 시간 나는 대로 적도록 하겠습니다.



Posted by liquidbird

2006/11/11 11:45 2006/11/11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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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선지가 왜 길머리가 되었는가?

이 주일쯤 전 용산역을 가기 위해 전철을 이리저리 갈아타고 가는 길이었다.

목적지에 따라 가야 할 플랫폼이 다르기 때문에 (각각의 플랫폼은 각각 다른 계단으로
올라가게 되어 있음. 잘못 올라가면 다시 내려왔다 맞는 곳을 찾아서 가야 함)
전광판에 '어느 플랫폼엔 어디 행 열차가 오고 지금 그 열차가 어디까지 왔다' 이게
표시가 되어 있었다. 거기까진 좋았는데, 이런 식으로 표시가 되어 있었다.
(정확한 건 아니지만 의미 파악에는 문제가 없으니 전광판 형태에 대해선 대충 넘어가시길)

타는곳   길머리   ....
  1         용산    ....
  2        영등포  ....

전광판 앞에 멈춰서서 한참을 생각했다. 도대체 '길머리'가 무슨 뜻이지?
'길머리'의 정확한 뜻은 생각이 안 났지만 분명 '뭔가가 시작되는 곳'이란 의 의미를
가진 말이라는 건 생각이 났다.  그럼 1번 승강장에 들어오는 열차는 용산에서
출발한 건가? 그런데 어디로 가는 기차지? 목적지는 왜 안 나오는 거지?
이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여기 쓰여진 '길머리'란 말이 어쩌면 목적지를 가리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1번 승강장으로 올라가 봤더니... 역시나 용산행이었다.

한참 생각한 덕에 열차는 하나 놓쳤다.


국어사전에서 '길머리'를 찾으면

[명사] =길목 .

다시 '길목'을 찾으면

1 큰길에서 좁은 길로 들어가는 어귀. ≒길나들이 ·길머리.
세 갈래 길목
큰길로 가다가 오른쪽 길목으로 빠지면 바로 우리 집이다.
2 길의 중요한 통로가 되는 어귀. ≒길나들이 .
길목을 막다
길목마다 지키다
그는 그녀가 다니는 길목에서 한참을 기다리고 있었다.
3 어떤 시기에서 다른 시기로 넘어가는 때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혁명의 길목
금세기는 다원적 세계로 나가는 길목에 서 있다.


위와 같이 나온다.
세부적으로 여러 가지 뜻이 있지만 기본적인 의미는 '무엇인가가 시작되는 곳' 이다.

그러면 어째서 이렇게 우리말의 기본적인 의미와 전혀 반대되는 말을 만들어서 쓰는 것인가?


'일본식 철도용어를 알기쉬운 우리말로 고친다'에 관련된 뉴스 링크는 다음과 같다.
http://news.naver.com/news/read.php?mode=LSD&office_id=015&article_id=0000179299&section_id=102&menu_id=102


위 뉴스에는 안 나오지만 어떤 말이 어떻게 바뀌었나에 관한 건 다른 뉴스에 또 나오는데

...[선략] 대합실은 '맞이방' , 행선지는 '길머리' 로 바뀐다. 대합실은 기다린다는 뜻의 대합 (待合.まちあぃ) 에 방을 뜻하는 실 (室) 이 붙은 것이며 우리말에는 대합이란 한자어가 없다. 이를 기다리고 맞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맞이방으로 바꿨다. 행선지는 가는 곳을 뜻하는 행선 (行先.ゆきさき) 에 목적지의 지 (地) 가 붙은 것이어서 순우리말인 길머리로 바꿨다. 같은 방식으로 개표 (改標) 는 '표확인' 으로, 승강장.홈은 '타는 곳' 으로 고쳤다. 이해하기 어려운 한자식 용어도 쉽게 풀어썼다. 전도역 (前途驛) 은 '다음역' 으로, 월승 (越乘) 은 '더 가기' 로 고쳤다  [후략] ....


위에서 보듯 일본말 '행선' (유키사키) 을 한 글자 한 글자 그대로 한글로 옮긴 것을 알 수 있다.
행 : '갈 행' 이니까 '길' 로.
선 : '앞 선' 이니까 앞=머리니까 '머리'로.
그래서 행선->길머리가 된 것 같은데...

글자 한 자 한 자를 기계적으로 바꾸니까 우리가 이미 알고 있던 우리말과 의미가 반대되는 이런 이상한 신조어가 나오는 것 아닌가. 더구나 일본어의 '先'은 여기서는 '머리'의 뜻도 아니다. 여기서의 '先' 을 이미지화해 보면

어떤 시스템이나 인적/물적 네트워크가 있다고 가정하자. 중앙에는 핵이 있고 사방으로 가지가 뻗어 나간다. 가지 중에서도 잔가지는 사방으로 많이 뻗어 나가고 각 잔가지의 끝은 외부세계와 접촉해서 정보를 교환하거나 어떤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이렇게 뻗어나간 것의 맨 끝부분, 즉 선단(端), 또는 말단(端)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 '선(先)'이다. 영어로 하자면 'end' 또는 'terminal' 정도의 느낌이 된다. 따라서 先이라는 글자의 의미 중 '먼저'라는 의미는 여기서는 전혀 없으며 '머리'라는 의미 역시 전혀 없다.

대략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다.  先이 이런 의미로 쓰인 대표적인 단어에는 '거래선(去來先)' 이 있다. '거래선'의 先도 역시 거래가 이루어지는 상대측의 접점이란 의미이다.

일본식 한자어를 한글로 바꾸면서 이상해진 대표적인 예로서는 몇 년 전 일본말 '노견'을 우리말로 '길어깨'로 바꾼 것을 들 수 있다. 정말 글자 한 자 한 자를 그대로 한글로 바꿔 버린 경우인데, 이제 욕 많이 먹고 다시 '갓길'로 바뀐지 오래 되었다. '가장자리+길' 의 뜻이니 의미상으로도 무리가 없는 자연스러운 말이 되었다.

행선지란 말을 쓰기 싫다면 그냥 '목적지'라고 하든지, '마지막 내리는 곳'이라고 하든지.
길***이란 꼴을 꼭 쓰고 싶다면 예를 들어 '길끝'이나 '길막' 과 같은 식으로 의미상으로 끝을 나타내도록 하는 것이 정확하지 않을까? (실제로 길끝이나 길막은 물론 말이 안 된다. 예를 든 것일 뿐)


일본식 용어를 없애기 위해 새로 만들어낸 우리말이, 우리가 이미 알고 있던 우리말과 의미 충돌을 일으키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Posted by liquidbird

2006/10/07 12:26 2006/10/07 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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